2006년 03월 09일
<브로크백 마운틴> 요리
더 큰 호기심을 끌려는 의도에서 이성간의 사랑을 동성간의 사랑으로 바꾸어놓았을 뿐 흔하디 흔한 "사랑"이라는 테마의 클리쉐에서 벗어나지 못한, 통속 멜로드라마에 머물고 만 작품이라고 이 영화를 사정없이 깔아뭉갤 수도 있겠다. 얼핏 냉정하고 예리한 평가같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은 수 백가지의 서로 다른 닭고기 요리를 앞에 두고, 닭고기 잖아, 그럼 다 똑같네 뭐... 그렇게 몰상식한 판단을 내리는 것과 다를 바 없겠다. 식재료가 같다고 해서 어떻게 요리가 같다고 할 수 있나. KFC 치킨과 백숙, 삼계탕, 전기구이 통닭, 깐풍기가 어떻게 같을 수 있나. 같은 식재료라도 양념, 요리방법, 요리하는 사람 등등에 따라서 천차만별의 요리가 나오는 법. 사랑이라는 일종의 식재료, 소재도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사랑이라는 식재료를 이용한 <브로크백 마운틴> 요리는 어떤 점이 남다를까. 우선, 같은 닭 종류 같지만 일반 닭과는 다른 오골계를 이용해서 삼계탕을 끓였다. 동성애에 대해서 어느 정도 닭살 증후군이 있는 나에게 <브로크백 마운틴>은 닭 대신 오골계라는 그 낯섬 때문에 처음 한 점을 입에 넣기가 무척이나 까탈스럽게 보였던 요리. 그런데, 이 오골계 삼계탕이 보편적인 삼계탕의 맛을 충분히 살려내면서 동시에 독특한 나름의 맛을 내고 있다. 남녀간의 사랑,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 이웃간의 사랑, 동성간의 사랑, 그 어떠한 사랑이든 그 원초적 형태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랑' 그 자체이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사랑은 바로 이 원초적 형태의 사랑이며, 그 사랑이 지닌 보편적 정서가 우리를 후려치고 있다. 더 많이 사랑하고 싶은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두 사람을 보면서 - 여기서는 사랑이 이성간이든 동성간이든 문제되지 않는다 - 우리가 안타까워 하고 가슴 아파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한 사람이 말없이 뒤에서 껴안을 때 그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 뭉클해 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두 사람이 벌거벗고 계곡에서 뛰어내릴 때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또 다른 장점은 완벽한 그 대칭구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화에서는 단지 하나의 대칭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수 많은 대칭들이 부딪치면서 스토리라인을 이끌어가는데, 딱딱한 그리고 직접적인 정-반-합의 변증법적 구조를 지니는 게 아니라, 각 대칭들이 얽히고 섥힌 다이나믹한 구조라는 데 특징이 있다. 수많은 대칭들이 동시에 등장할 경우, 자칫하면 서로 어긋나서 방향타를 상실하기 쉬운 위험성이 있지만, 이안 감독은 밸런스를 적절히 유지하면서 이 대칭들이 영화의 스토리라인을 자연스럽게 이끌어가도록 배려하고 있다. 감독의 역량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영화 전반에 걸쳐 가장 크게 나타나는 대칭은 역시 에니스와 잭이다.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잭에 비해, 에니스는 그렇지 못하다. 여기에, 뛰어난 자연풍광의 브로크백 마운틴의 그 여유로움과 신비감은, 쓸쓸하다 못해 황폐함까지 느껴지는 도시의 모습과 완벽한 대칭을 이룬다. 원초적 형태의 사랑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이루어질 수 있는 원초적 자연의 모습이 브로크백 마운틴이라면, 도시는 이 원초적 사랑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인위적, 관습적 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에니스와 잭, 두 사람의 브로크백 마운틴으로의 회귀 본능은 두 사람의 사랑이 원초적 형태의 사랑이기에, 그리고 그 사랑은 역시 원초적 자연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설정에 기초한다.
이러한 원초적 사랑에 대칭되는 개념으로 다른 형태의 사랑이 등장한다. 에니스와 잭, 두 사람의 결혼생활이다. 에니스와 잭, 이들의 입장에서 그리고 동시에 그들의 아내 입장에서 감정을 이입하여 영화를 보면, 하나의 사랑이 또 다른 사랑을 배신하고 배척하는 대칭적 모순 구조가 나타난다. 에니스와 잭의 아내 입장에서 보면 에니스와 잭의 사랑은 배신이다. 특히 자신의 남편이 외간 남자와 격정적으로 키스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 에니스의 아내 입장에서 보면, 이건 우황청심환 10알을 한꺼번에 먹어도 쉽게 가라앉힐 수 없는 핵폭탄급 배신이다. 다른 한편, 사회적 관습과도 결부된 결혼(그리고 사랑)은, 에니스와 잭 두 사람이 더 많이 사랑하고 싶어도 그렇게 못하도록 방해하는 걸림돌이다. 에니스가 이혼했다는 소식을 접한 순간 기쁜 마음에 그 먼 거리를 한 방에 달려온 잭을 생각해 보면, 이 걸림돌이 두 사람을 얼마나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처럼 두 객체가 서로 부딪치는 대칭구조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 객체 안에서 벌어지는 대칭도 있다.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된 후 약간은 머쓱해져 산을 내려오면서, 나누는 두 사람의 대화: "난 게이 아냐..." "나도 아냐." 입 밖으로 뱉은 이 말과 가슴 속에 자리잡은 상대방에 대한 사랑은 상호배반적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 손에 이끌려 처참하게 죽은 동성애자의 죽음을 목격한 에니스에게 특히 이 내적 갈등은 더욱 심하게 나타나고, 이 갈등으로 인해 같이 살자는 잭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함으로써 두 사람 사이에 또 다른 갈등의 고리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이처럼 각각의 대칭들이 서로 부딪치면서 갈등 구조를 엮어내지만, 감독은 일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절대 깊숙하게 개입하지 않는다. 냉정할 정도로 객관적이다. 영화가 그냥 흘러가도록 내버려두고, 모든 건 관객의 몫이다. 이 점이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의>과 이안 감독의 또 다른 장점이다. 이런 이런 상황인데, 이렇게 이렇게 되어서, 이런 결말이란다... 감독은 결코 친절한 해설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 결과 관객은 더 많은 걸 스스로 보게 된다. 에니스와 잭, 두 사람이 처음 산에 올라갔을 때 야영하는 장면을 상기해보라. 에니스가 잭이 죽었다는 엽서를 받은 후 잭의 아내와 통화하는 장면, 그리고 에니스가 잭의 부모를 찾아갔을 때의 장면들은 또 어떠한가. 결혼 소식을 알리러 온 딸과 에니스의 대화에서 관객이 그 표면적인 대화를 뛰어넘어 더 많은 걸 보게 되는 것 또한 이 때문이다. 자초지종 전후상황 및 그 전개에 대해 감독의 친절한 배려가 없다고 해서 흐름의 무리한 점핑이 있는 것도 아니다. 즉, 과잉되지 않은 절제 속에서 무리없는 흐름을 이루어낸 편집이 돋보인다. 여기에, 역시 철저하게 절제된 음악 또한 한 몫을 하고있으니 완성도가 더 높아질 수밖에.
관객에게 더 많은 것을 스스로 보게 만드는 감독의 객관성은 다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영화에서 감독의 분신은 누구인가.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인 동시에 그 누구도 아니다. 그렇기에 관객은 그 누구에게 감정을 이입하든 그 캐릭터에 동조하게 된다. 이는 앞서 얘기한 대칭들의 자연스러운 부딪침과 흐름에도 작용, 모르긴 해도 관객은 영화를 볼 때마다 매번 다른 경험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관객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 듯 하다. 그런데, 이 생각들이란 게 아마도 정리되지 않은, 뭔가 느낌은 있으되 딱히 뭐라고 단정적으로 얘기하기는 힘든, 그런 생각들일 듯. 맛 있는 요리를 먹고난 후 배도 부르고 입 안에 그 맛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누군가가 어땠어? 하고 물어오면 그 요리에 대해서 어떻다고 얘기하기 힘든, 아마도 그런 느낌.
그렇다면, 사랑이라는 식재료를 이용한 <브로크백 마운틴> 요리는 어떤 점이 남다를까. 우선, 같은 닭 종류 같지만 일반 닭과는 다른 오골계를 이용해서 삼계탕을 끓였다. 동성애에 대해서 어느 정도 닭살 증후군이 있는 나에게 <브로크백 마운틴>은 닭 대신 오골계라는 그 낯섬 때문에 처음 한 점을 입에 넣기가 무척이나 까탈스럽게 보였던 요리. 그런데, 이 오골계 삼계탕이 보편적인 삼계탕의 맛을 충분히 살려내면서 동시에 독특한 나름의 맛을 내고 있다. 남녀간의 사랑,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 이웃간의 사랑, 동성간의 사랑, 그 어떠한 사랑이든 그 원초적 형태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랑' 그 자체이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사랑은 바로 이 원초적 형태의 사랑이며, 그 사랑이 지닌 보편적 정서가 우리를 후려치고 있다. 더 많이 사랑하고 싶은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두 사람을 보면서 - 여기서는 사랑이 이성간이든 동성간이든 문제되지 않는다 - 우리가 안타까워 하고 가슴 아파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한 사람이 말없이 뒤에서 껴안을 때 그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 뭉클해 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두 사람이 벌거벗고 계곡에서 뛰어내릴 때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또 다른 장점은 완벽한 그 대칭구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화에서는 단지 하나의 대칭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수 많은 대칭들이 부딪치면서 스토리라인을 이끌어가는데, 딱딱한 그리고 직접적인 정-반-합의 변증법적 구조를 지니는 게 아니라, 각 대칭들이 얽히고 섥힌 다이나믹한 구조라는 데 특징이 있다. 수많은 대칭들이 동시에 등장할 경우, 자칫하면 서로 어긋나서 방향타를 상실하기 쉬운 위험성이 있지만, 이안 감독은 밸런스를 적절히 유지하면서 이 대칭들이 영화의 스토리라인을 자연스럽게 이끌어가도록 배려하고 있다. 감독의 역량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영화 전반에 걸쳐 가장 크게 나타나는 대칭은 역시 에니스와 잭이다.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잭에 비해, 에니스는 그렇지 못하다. 여기에, 뛰어난 자연풍광의 브로크백 마운틴의 그 여유로움과 신비감은, 쓸쓸하다 못해 황폐함까지 느껴지는 도시의 모습과 완벽한 대칭을 이룬다. 원초적 형태의 사랑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이루어질 수 있는 원초적 자연의 모습이 브로크백 마운틴이라면, 도시는 이 원초적 사랑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인위적, 관습적 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에니스와 잭, 두 사람의 브로크백 마운틴으로의 회귀 본능은 두 사람의 사랑이 원초적 형태의 사랑이기에, 그리고 그 사랑은 역시 원초적 자연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설정에 기초한다.
이러한 원초적 사랑에 대칭되는 개념으로 다른 형태의 사랑이 등장한다. 에니스와 잭, 두 사람의 결혼생활이다. 에니스와 잭, 이들의 입장에서 그리고 동시에 그들의 아내 입장에서 감정을 이입하여 영화를 보면, 하나의 사랑이 또 다른 사랑을 배신하고 배척하는 대칭적 모순 구조가 나타난다. 에니스와 잭의 아내 입장에서 보면 에니스와 잭의 사랑은 배신이다. 특히 자신의 남편이 외간 남자와 격정적으로 키스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 에니스의 아내 입장에서 보면, 이건 우황청심환 10알을 한꺼번에 먹어도 쉽게 가라앉힐 수 없는 핵폭탄급 배신이다. 다른 한편, 사회적 관습과도 결부된 결혼(그리고 사랑)은, 에니스와 잭 두 사람이 더 많이 사랑하고 싶어도 그렇게 못하도록 방해하는 걸림돌이다. 에니스가 이혼했다는 소식을 접한 순간 기쁜 마음에 그 먼 거리를 한 방에 달려온 잭을 생각해 보면, 이 걸림돌이 두 사람을 얼마나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처럼 두 객체가 서로 부딪치는 대칭구조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 객체 안에서 벌어지는 대칭도 있다.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된 후 약간은 머쓱해져 산을 내려오면서, 나누는 두 사람의 대화: "난 게이 아냐..." "나도 아냐." 입 밖으로 뱉은 이 말과 가슴 속에 자리잡은 상대방에 대한 사랑은 상호배반적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 손에 이끌려 처참하게 죽은 동성애자의 죽음을 목격한 에니스에게 특히 이 내적 갈등은 더욱 심하게 나타나고, 이 갈등으로 인해 같이 살자는 잭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함으로써 두 사람 사이에 또 다른 갈등의 고리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이처럼 각각의 대칭들이 서로 부딪치면서 갈등 구조를 엮어내지만, 감독은 일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절대 깊숙하게 개입하지 않는다. 냉정할 정도로 객관적이다. 영화가 그냥 흘러가도록 내버려두고, 모든 건 관객의 몫이다. 이 점이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의>과 이안 감독의 또 다른 장점이다. 이런 이런 상황인데, 이렇게 이렇게 되어서, 이런 결말이란다... 감독은 결코 친절한 해설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 결과 관객은 더 많은 걸 스스로 보게 된다. 에니스와 잭, 두 사람이 처음 산에 올라갔을 때 야영하는 장면을 상기해보라. 에니스가 잭이 죽었다는 엽서를 받은 후 잭의 아내와 통화하는 장면, 그리고 에니스가 잭의 부모를 찾아갔을 때의 장면들은 또 어떠한가. 결혼 소식을 알리러 온 딸과 에니스의 대화에서 관객이 그 표면적인 대화를 뛰어넘어 더 많은 걸 보게 되는 것 또한 이 때문이다. 자초지종 전후상황 및 그 전개에 대해 감독의 친절한 배려가 없다고 해서 흐름의 무리한 점핑이 있는 것도 아니다. 즉, 과잉되지 않은 절제 속에서 무리없는 흐름을 이루어낸 편집이 돋보인다. 여기에, 역시 철저하게 절제된 음악 또한 한 몫을 하고있으니 완성도가 더 높아질 수밖에.
관객에게 더 많은 것을 스스로 보게 만드는 감독의 객관성은 다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영화에서 감독의 분신은 누구인가.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인 동시에 그 누구도 아니다. 그렇기에 관객은 그 누구에게 감정을 이입하든 그 캐릭터에 동조하게 된다. 이는 앞서 얘기한 대칭들의 자연스러운 부딪침과 흐름에도 작용, 모르긴 해도 관객은 영화를 볼 때마다 매번 다른 경험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관객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 듯 하다. 그런데, 이 생각들이란 게 아마도 정리되지 않은, 뭔가 느낌은 있으되 딱히 뭐라고 단정적으로 얘기하기는 힘든, 그런 생각들일 듯. 맛 있는 요리를 먹고난 후 배도 부르고 입 안에 그 맛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누군가가 어땠어? 하고 물어오면 그 요리에 대해서 어떻다고 얘기하기 힘든, 아마도 그런 느낌.
# by | 2006/03/09 09:42 | 영화를 봤는데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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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땠어?" 하고 물어 오면 어떻다고 말하기 힘든, 아마도 그런 느낌... 이백프로 공감. 전 아마 이 영화에 관해선 영원히 벙어리로 남을지도 모르겠어요. 흑. 어떻게든 트랙백은 해두고 싶은데 말이죠. (혹시 비공개 글에 트랙백이라도 이해를;;)
정말이지 생각의 여지가 많이 남겨진 영화라 생각합니다.
깊게 깊게.. 많은 시간을 두고 생각해봐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