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05월 09일
마리아 펠릭스(Maria Felix) - 멕시코의 전설
원래 이곳 블로그 개설의 주목적은 라틴 영화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지금까지 전혀 관계없는 이상한 얘기들만 늘어놓다가 이제서야 첫 포스트를 올리는 이 게으름. (이곳에 글을 다 쓰고난 다음, MDL 인명 코멘트에는 축약판을 올림.)
88세를 일기로 지난 2002년 4월 8일 세상을 떠난 (자료를 보니까 태어난 날도 4월 8일) 멕시코의 전설적인 여배우 마리아 펠릭스. 당당하면서도 지적이며 동시에 관능적인 섹시함을 두루 갖추었던 마리아 펠릭스는 멕시코 영화사의 황금기였던 1940년대부터 이후 30여년 넘게 은막의 스타로 화려한 각광을 받으면서, 멕시코 영화사 최고의 여배우로 손꼽힌다.옆에 올려진 사진을 한번 보시라. 아, 이 분위기.
1914년, 알라모스에서 16남매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마리아는 과달라자라에서 공부하는데, 이곳에서 대학 카니발 퀸으로 선출되기도 한다. 졸업 후에는 멕시코 시티의 한 성형외과에서 일하게 되는데, 담당의사가 손님들을 끌기 위해 마리아를 모델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그만큼 미모가 뛰어났다는 얘기. 극영화 데뷔는 1942년 "영혼들의 협곡"이라는 뜻을 지닌 <엘 뻬뇬 데 라스 아니마스(El Penon De Las Animas)>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서로 원수지간인 두 집안에서 태어난 두 연인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에서 마리아는 유명한 배우이자 가수이기도 한 호르헤 네그레떼(Jorge Negrete)의 상대역을 맡았는데, 이 때의 인연 때문인지 네그레떼는 후에 마리아의 세 번째 남편이 되기도 한다.
마리아가 스타덤에 오르게 된 것은 세 번째 출연작인 페르난도 데 푸엔떼스 감독의 <도냐 바르바라(Doña Barbara)>(1943)부터. 일부에서는 마리아의 연기력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지만, 한 비평가에 따르면, 마리아는 이 영화에서 “존경받는 여배우이자 확고한 스타의 자리”를 거머쥐었다고 한다. 영화 <도냐 바르바라>는 어렸을 때 성폭행을 당한 후 남장차림으로 자신의 농장을 독재적으로 운영하는 한 베네주엘라 여인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 (마리아는 이후 1944년작 < La Monja Alferez>에서 다시 남장차림으로 등장한다.) 마리아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멕시코를 간접적으로 상징하기도 했던 극중 여주인공과 일심동체, 이 배역을 완벽하게 소화해냄으로써 자신의 이미지를 확고하게 굳힌다. 그리고, 거짓과 위선으로 상류층에 오르는 한 여인의 이야기를 다룬 1943년작 <영혼이 없는 여인(La Mujer Sin Alma)>, 그리고 <리오 에스꼰디도(Rio Escondido)>(1947)에 이르기까지, <도냐 바르바라>에서 형성된 마리아의 이 "도냐" 이미지는 계속 이어진다.

<사랑에 빠져(Enamorada)>(1947)는 마리아에게 자칫 멜로드라마의 한정된 이미지로 굳어질 뻔 한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이 상큼한 코메디 영화는 혁명군 리더(뻬드로 아르멘다리스)가 막강한 권력을 지닌 지주의 딸(마리아 펠릭스)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뻬드로가 마리아에게 구애했다가 거절당하지만 결국은 사랑을 얻어내는 과정이 코믹하게 묘사된다. 마리아에게 사랑을 고백했다가 따귀까지 맞으며 계속 거절당하다가, 나중에는 뻬드로가 도리어 마리아의 따귀를 때리면서 멕시코 영화의 영원한 화두 중 하나인 마초이즘에 미녀가 끌리는 그런 시퀀스. 촬영감독 가브리엘 피구에로아는 이 영화의 한 장면에서, 침대의 마리아 펠릭스 모습을 극도의 클로즈 업으로 얼굴과 코만 잡아내면서, 미의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있다. 바로 다음 장면. 리마스터링을 해서 출시되었음에도 워낙 오래 된 영화라 DVD 화질 자체가 그렇게 좋지는 않다.

마리아는 1940년대에 모두 18편의 영화를 찍었으며, 1970년까지 계속 멕시코에서 활동하면서 모두 47편의 영화에 출연한다. 이외에도 스페인, 이태리, 프랑스 등에서 장 르누아르(1954년작 <프렌치 캉캉>), 루이 브뉘엘(1959년작 <죄의 공화국>) 등의 감독과도 같이 작업을 했으나, 유럽에서의 출연작들은 대부분 실망스러운 수준에 그치고 만다.
마리아는 멕시코 출신 여배우로서는 처음 국제적인 조명을 받은 돌로레스 델 리오와 <라 쿠카라차>(1958)에서 함께 공연했으며, 1970년에는 TV 시리즈 < La Constitución>에 출연, 3차례에 걸쳐 아리엘 최우수 여배우 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1985년에는 공로상과 멕시코 시티 시민상을 수상한다. 그리고 1996년, 남미 출신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화예술 부문의 최고 훈장인 코망되르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는 영예를 안는다.
1992년 아들인 엔리끄가 어머니의 모습을 찍은 사진집을 출간하는데, 이 사진집은 옥타비오 빠즈가 서문을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후 마리아는 1993년 자신이 직접 자서전을 출간하기도 하며, 아들 엔리끄가 1996년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그를 기리는 수필집을 내기도 했다.
여배우로서의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그럼 마리아의 사생활은? 마리아는 그 유명세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종종 언론의 관심의 대상이 되곤 했다. 마리아는 평생 네 번 결혼을 했다. 첫 남편 엔리끄 알바레즈(1931-38)와의 사이에서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혼 후 엔리끄가 아이를 납치하는 소동을 벌였다가 마리아와 두 번째 남편인 싱어송 라이터인 아구스틴 라라(1943-47)에 의해서 구출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세 번째 남편인 호르헤 네그레떼와는 1952년 결혼한 지 14개월만에 네그레떼가 간염으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사별했는데, 이 때 남편의 유해를 들고 멕시코로 돌아오면서, 바지를 입었다고 해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마리아의 네 번째 결혼 상대는 스위스 출신의 비즈니스맨 알렉스 버거. 1956년 결혼했으나, 1974년 세상을 떠났다.
마리아는 장 꼭도와 디에고 리베라 등 세계의 유명 화가들이 즐겨 모델로 그림을 그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중 리베라는 마리아의 연인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사실, 마리아의 연인은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마리아를 속이 훤히 비치는 옷차림으로 그려 그녀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마리아는 또한 옥타비오 빠즈와 까를로스 푸엔떼스를 비롯 많은 작가들의 영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마리아는 세계적인 갑부 및 유명인사들과 항상 어울려 지냈는데, 옷은 언제나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즐겨 입었다고. 1984년에는 프랑스와 이태리에서 세계 베스트 드레서로 뽑히기도 했다. 이집트의 파루크 왕은 마리아와 하룻 밤을 보낼 수 있다면 네페르티티 왕관을 선물하겠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고.
스타 여배우와 그 아들간의 근친상간 내용을 다룬 푸엔테스의 작품 ‘조나 사그라다’를 토대로 영화화하려던 작품의 섭외가 들어와서, 마리아는 아들 엔리끄와 함께 이 작품에 출연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이 작품의 영화화가 불발로 끝나는 바람에 마리아는 나중에 불명예스러운 오해를 받을지도 모를 위기를 넘기게 된다. 이 작품의 내용이 마리아와 그 아들 엔리끄의 관계를 묘사한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두 사람이 심정적으로 매우 가까운 관계이기는 했지만, 이 소문은 근거없는 낭설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마리아는 도자기, 카펫, 보석류, 은제품, 캐쉬미어 쇼올, 중국 옷, 책 그리고 골동품 가구를 즐겨 모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0년, 코뿔소 옆에 있는 마리아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비롯 한참 연하의 연인이었던 Antoine Tzapoff의 그림 전시회가 티주아나에서 열렸는데, 같은 시기에 마리아 펠릭스 회고 영화전이 함께 열리기도 했다.
마리아는 경마 말을 소유하고 있던 파리와 멕시코 시티를 오가며 말년을 보냈다. 이 때도 마리아는 4시간짜리 특집 TV 프로그램을 비롯 항상 언론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옥타비오 빠즈는 마리아를 일컬어, “스스로를 창조한 인물”이라고 쓴 적이 있다. 마리아 펠릭스 - 그녀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이루어지든,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한 가지 있다. 바로, 마리아 펠릭스는 영화에서 그리고 현실에서 멕시코의 전설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
Personal quotes from IMDb
"Me Empty? Nobody has seen inside of me."
"내가 속이 비었다고? 지금까지 내 속을 들여다 본 사람이 없거늘."
"What can I do? I can't be ugly."
"나보고 어쩌라고? 추해질래야 추해질 수가 없는데."
"Some friends told me that pearls make people cry. The only pearls that have made me cry are false pearls"
"어떤 친구들은 진주가 사람을 울린다고 얘기한다. 나를 울린 진주는 단 하나. 가짜 진주뿐이다."
88세를 일기로 지난 2002년 4월 8일 세상을 떠난 (자료를 보니까 태어난 날도 4월 8일) 멕시코의 전설적인 여배우 마리아 펠릭스. 당당하면서도 지적이며 동시에 관능적인 섹시함을 두루 갖추었던 마리아 펠릭스는 멕시코 영화사의 황금기였던 1940년대부터 이후 30여년 넘게 은막의 스타로 화려한 각광을 받으면서, 멕시코 영화사 최고의 여배우로 손꼽힌다.옆에 올려진 사진을 한번 보시라. 아, 이 분위기.1914년, 알라모스에서 16남매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마리아는 과달라자라에서 공부하는데, 이곳에서 대학 카니발 퀸으로 선출되기도 한다. 졸업 후에는 멕시코 시티의 한 성형외과에서 일하게 되는데, 담당의사가 손님들을 끌기 위해 마리아를 모델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그만큼 미모가 뛰어났다는 얘기. 극영화 데뷔는 1942년 "영혼들의 협곡"이라는 뜻을 지닌 <엘 뻬뇬 데 라스 아니마스(El Penon De Las Animas)>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서로 원수지간인 두 집안에서 태어난 두 연인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에서 마리아는 유명한 배우이자 가수이기도 한 호르헤 네그레떼(Jorge Negrete)의 상대역을 맡았는데, 이 때의 인연 때문인지 네그레떼는 후에 마리아의 세 번째 남편이 되기도 한다.
마리아가 스타덤에 오르게 된 것은 세 번째 출연작인 페르난도 데 푸엔떼스 감독의 <도냐 바르바라(Doña Barbara)>(1943)부터. 일부에서는 마리아의 연기력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지만, 한 비평가에 따르면, 마리아는 이 영화에서 “존경받는 여배우이자 확고한 스타의 자리”를 거머쥐었다고 한다. 영화 <도냐 바르바라>는 어렸을 때 성폭행을 당한 후 남장차림으로 자신의 농장을 독재적으로 운영하는 한 베네주엘라 여인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 (마리아는 이후 1944년작 < La Monja Alferez>에서 다시 남장차림으로 등장한다.) 마리아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멕시코를 간접적으로 상징하기도 했던 극중 여주인공과 일심동체, 이 배역을 완벽하게 소화해냄으로써 자신의 이미지를 확고하게 굳힌다. 그리고, 거짓과 위선으로 상류층에 오르는 한 여인의 이야기를 다룬 1943년작 <영혼이 없는 여인(La Mujer Sin Alma)>, 그리고 <리오 에스꼰디도(Rio Escondido)>(1947)에 이르기까지, <도냐 바르바라>에서 형성된 마리아의 이 "도냐" 이미지는 계속 이어진다.

<사랑에 빠져(Enamorada)>(1947)는 마리아에게 자칫 멜로드라마의 한정된 이미지로 굳어질 뻔 한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이 상큼한 코메디 영화는 혁명군 리더(뻬드로 아르멘다리스)가 막강한 권력을 지닌 지주의 딸(마리아 펠릭스)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뻬드로가 마리아에게 구애했다가 거절당하지만 결국은 사랑을 얻어내는 과정이 코믹하게 묘사된다. 마리아에게 사랑을 고백했다가 따귀까지 맞으며 계속 거절당하다가, 나중에는 뻬드로가 도리어 마리아의 따귀를 때리면서 멕시코 영화의 영원한 화두 중 하나인 마초이즘에 미녀가 끌리는 그런 시퀀스. 촬영감독 가브리엘 피구에로아는 이 영화의 한 장면에서, 침대의 마리아 펠릭스 모습을 극도의 클로즈 업으로 얼굴과 코만 잡아내면서, 미의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있다. 바로 다음 장면. 리마스터링을 해서 출시되었음에도 워낙 오래 된 영화라 DVD 화질 자체가 그렇게 좋지는 않다.

마리아는 1940년대에 모두 18편의 영화를 찍었으며, 1970년까지 계속 멕시코에서 활동하면서 모두 47편의 영화에 출연한다. 이외에도 스페인, 이태리, 프랑스 등에서 장 르누아르(1954년작 <프렌치 캉캉>), 루이 브뉘엘(1959년작 <죄의 공화국>) 등의 감독과도 같이 작업을 했으나, 유럽에서의 출연작들은 대부분 실망스러운 수준에 그치고 만다.
마리아는 멕시코 출신 여배우로서는 처음 국제적인 조명을 받은 돌로레스 델 리오와 <라 쿠카라차>(1958)에서 함께 공연했으며, 1970년에는 TV 시리즈 < La Constitución>에 출연, 3차례에 걸쳐 아리엘 최우수 여배우 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1985년에는 공로상과 멕시코 시티 시민상을 수상한다. 그리고 1996년, 남미 출신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화예술 부문의 최고 훈장인 코망되르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는 영예를 안는다.
1992년 아들인 엔리끄가 어머니의 모습을 찍은 사진집을 출간하는데, 이 사진집은 옥타비오 빠즈가 서문을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후 마리아는 1993년 자신이 직접 자서전을 출간하기도 하며, 아들 엔리끄가 1996년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그를 기리는 수필집을 내기도 했다.
여배우로서의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그럼 마리아의 사생활은? 마리아는 그 유명세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종종 언론의 관심의 대상이 되곤 했다. 마리아는 평생 네 번 결혼을 했다. 첫 남편 엔리끄 알바레즈(1931-38)와의 사이에서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혼 후 엔리끄가 아이를 납치하는 소동을 벌였다가 마리아와 두 번째 남편인 싱어송 라이터인 아구스틴 라라(1943-47)에 의해서 구출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세 번째 남편인 호르헤 네그레떼와는 1952년 결혼한 지 14개월만에 네그레떼가 간염으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사별했는데, 이 때 남편의 유해를 들고 멕시코로 돌아오면서, 바지를 입었다고 해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마리아의 네 번째 결혼 상대는 스위스 출신의 비즈니스맨 알렉스 버거. 1956년 결혼했으나, 1974년 세상을 떠났다.
마리아는 장 꼭도와 디에고 리베라 등 세계의 유명 화가들이 즐겨 모델로 그림을 그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중 리베라는 마리아의 연인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사실, 마리아의 연인은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마리아를 속이 훤히 비치는 옷차림으로 그려 그녀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마리아는 또한 옥타비오 빠즈와 까를로스 푸엔떼스를 비롯 많은 작가들의 영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마리아는 세계적인 갑부 및 유명인사들과 항상 어울려 지냈는데, 옷은 언제나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즐겨 입었다고. 1984년에는 프랑스와 이태리에서 세계 베스트 드레서로 뽑히기도 했다. 이집트의 파루크 왕은 마리아와 하룻 밤을 보낼 수 있다면 네페르티티 왕관을 선물하겠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고.
스타 여배우와 그 아들간의 근친상간 내용을 다룬 푸엔테스의 작품 ‘조나 사그라다’를 토대로 영화화하려던 작품의 섭외가 들어와서, 마리아는 아들 엔리끄와 함께 이 작품에 출연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이 작품의 영화화가 불발로 끝나는 바람에 마리아는 나중에 불명예스러운 오해를 받을지도 모를 위기를 넘기게 된다. 이 작품의 내용이 마리아와 그 아들 엔리끄의 관계를 묘사한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두 사람이 심정적으로 매우 가까운 관계이기는 했지만, 이 소문은 근거없는 낭설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마리아는 도자기, 카펫, 보석류, 은제품, 캐쉬미어 쇼올, 중국 옷, 책 그리고 골동품 가구를 즐겨 모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0년, 코뿔소 옆에 있는 마리아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비롯 한참 연하의 연인이었던 Antoine Tzapoff의 그림 전시회가 티주아나에서 열렸는데, 같은 시기에 마리아 펠릭스 회고 영화전이 함께 열리기도 했다.
마리아는 경마 말을 소유하고 있던 파리와 멕시코 시티를 오가며 말년을 보냈다. 이 때도 마리아는 4시간짜리 특집 TV 프로그램을 비롯 항상 언론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옥타비오 빠즈는 마리아를 일컬어, “스스로를 창조한 인물”이라고 쓴 적이 있다. 마리아 펠릭스 - 그녀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이루어지든,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한 가지 있다. 바로, 마리아 펠릭스는 영화에서 그리고 현실에서 멕시코의 전설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
Personal quotes from IMDb
"Me Empty? Nobody has seen inside of me."
"내가 속이 비었다고? 지금까지 내 속을 들여다 본 사람이 없거늘."
"What can I do? I can't be ugly."
"나보고 어쩌라고? 추해질래야 추해질 수가 없는데."
"Some friends told me that pearls make people cry. The only pearls that have made me cry are false pearls"
"어떤 친구들은 진주가 사람을 울린다고 얘기한다. 나를 울린 진주는 단 하나. 가짜 진주뿐이다."
# by | 2005/05/09 15:51 | 영화를 봤는데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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