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01월 10일
<빤초 비야와 함께! (Vamonos con Pancho Villa)>(1936)
1930년대 중반 이후부터 1950년대까지의 멕시코 영화 황금기, 이 황금기 이전 가장 유명했던 그리고 궁극적으로 황금기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멕시코 영화감독을 딱 한 사람만 꼽으라면, 아마도 페르난도 데 푸엔떼스(Fernando de Fuentes)가 아닐까. 멕시코 최초의 유성영화인 <산따(Santa)>(1931)의 제2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푸엔떼스 감독은 멕시코 영화에 본격적인 비주얼 내러티브 스타일을 정착시킨 감독으로, 그 탁월한 역량과 영화적 테크닉으로 멕시코 영화의 수준을 몇 단계 끌어올린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멕시코 영화계 최고의 촬영감독으로 손꼽히는 가브리엘 피구에로아(Gabriel Figueroa)를 발견, 두 사람의 공동작업으로 호러, 멕시코식 코메디, 멜로드라마, 역사드라마 등 멕시코 영화의 여러 신 장르를 개척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멕시코 영화계의 전설, 마리아 펠릭스를 본격적인 스타덤에 오르게 한 <도냐 바르바라 (Doña Bárbara)>(1943)도 바로 이 양반 작품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적이 있으므로, 궁금하신 분은 마리아 펠릭스 링크를 따라가시면 되겠다. (참고로, 피구에로아 촬영감독과 마리아 펠릭스에 대한 얘기도 그 포스트에 잠깐 나온다.)
푸엔떼스 감독이 처음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33년작 <13번 죄수 (El prisionero trece)>부터. 이 영화는 이후 <대부 멘도사 (El compadre Mendoza)>(1934)를 거쳐 <빤초 비야와 함께! (Vámonos con Pancho Villa)>(1936)로 이어지는 푸엔떼스 감독의 이른바 혁명3부작 중 첫 작품.
멕시코 영화계에서 가장 많이 다루어진 화두 중 하나가 바로 멕시코 혁명. 이는 멕시코 혁명이 그만큼 멕시코 민중에게 직간접적으로 끼친 영향이 크기 때문이리라. 푸엔떼스 감독의 혁명 3부작도 역시 이런 맥락에서 제작되었는데, 앞의 두 작품은 소문만 들었을 뿐 쥔장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뭐라 얘기할 수가 없고, 다행이 <빤초 비야와 함께!>는 미국에서 디븨디로 출시되어 이 포스트를 올릴 수 있게 되었다. 디븨디 만세.
영화는 제목에서 힌트를 주고 있듯, 멕시코 혁명과 빤초 비야, 그리고 혁명의 와중에 빤초 비야 군에 가담하는 농민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멕시코 혁명과 빤초 비야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아니면, 바로 이전 포스트를 참조. 그 놈이 그 놈.
영화 줄거리는 간단하다. 혁명이 일어났다, 모두들 대의를 위해 떨쳐 일어났는데 우리만 여기서 이렇게 지낼 수 있느냐, 우리 쪽 팔리게 이렇게 살지말자, 혁명에 가담하자, 빤초 비야에게 가자. 스스로를 "산빠블로의 사자들"이라고 여기는 산빠블로의 여섯 농민들이 혁명에 가담하기 위해 빤초 비야를 찾아간다.
영화 원본의 보관상태가 열악, 리마스터링을 거쳐서 디븨디로 출시되었다는데도 화질이 썩 좋지가 않다. 따라서 일부는 영화 화면 캡춰, 일부는 디븨디에 들어있는 스틸 컷 중에서 사용.
혁명에 가담하기 위해 빤초 비야를 찾아온 여섯 명의 산빠블로 농민들
빤초 비야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기에 바쁘다. 그리고 한 마디 하는데,

빤초 비야는 누구나 환영한다. 잘 왔다. 산빠블로의 사자들이라고? 하하하. 어디, 그 이름에 어울릴만큼 용맹한지, 지켜보겠다. 그리고 산빠블로의 여섯 농민들, 아니 사자들은 전투에 참가해서 용감하게 싸운다.
영화에서는 상당히 큰 스케일의 전투 씬이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상당히 역동적이다. 미국 출신의 잭 드레이퍼(Jack Draper)와 가브리엘 피구에로아가 맡은 촬영은 롱 샷을 통해 전투의 스케일감을, 그리고 적절한 미디엄 샷을 통해 전투의 생생한 모습을 전하고 있다.

농민들은 왜 이렇게 열렬히 혁명에, 빤초 비야 군에 참여해서 목숨까지 내놓고 싸우는 것일까? 대지주의 배만 불리는 아시엔다(hacienda) 제도로 농민들의 삶은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상황에서, 농민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떨쳐 일어난 빤초 비야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낼 수는 있겠다. 그러나, 그냥 지지만 보내고 방관자로 남을 수도 있으련만, 이렇게 직접 혁명에 가담, 목숨까지 걸고 투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 밑바탕에는 멕시코인 특유의 마초이즘이 깔려 있는지도 모르겠다. 싸나이 한 목숨 대의를 위해 바쳐야 삶의 의미가 있다, 비겁하게 사는 건 남자로서 사는 게 아니다,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다, 내 인생에서 중요한 건 친구, 친구와 함께 대의를 위해 이 한 목숨 기꺼이 내놓으리라.
푸엔떼스 감독은 전투 중간 중간 휴식을 취하는 동안, 전투에 가담한 농민들의 대화를 통해 이런 멕시코인들의 마초이즘을 드러내고 있다.


처음 여섯 명이 빤초 비야 군에 가담한 산빠블로의 농민들은 전투가 계속될 수록 하나 둘 그 수가 줄어든다. 그러나 목숨을 잃은 사람들 모두 떳떳하고 용감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친구와 함께 대의를 위해 싸우다 목숨을 잃게 된 것이므로. 그리고 자신이 눈을 감는 그 옆에 친구들이 있으므로.
빤초 비야 군은 한 전투에서 수세에 몰리자, 적군에게 거짓 항복을 하는 척 하면서 시간을 벌어 전열을 가다듬으려 한다. 이를 위해 적군을 찾아가는 임무를 산빠블로의 농민군 세 명이 맡게 된다. 후에 빤초 비야 군의 항복이 거짓임이 들통나자, 사실이 확인될 때까지 인질로 잡혀 있던 이들 세 명은 빤초 비야 군 앞에서 본보기로 공개 교수형을 당하기 위해 적군들에게 끌려나가는데, 멕시코 마초들의 이 당당한 모습을 한 번 보시라.
영화에서 이러한 마초이즘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산빠블로의 사자들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후, 산빠블로의 마지막 남은 세 농민은 빤초 비야에게 그 공을 인정받아 소령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도라도스(Dorados), 즉 '황금의 남자들'이라는 빤초 비야의 친위대에 포함되는 영광을 안는다. 세 사람은 므흣한 마음으로 한 잔 걸치기 위해 빠에 들러 미리 와 있던 동지들과 합석을 하는데, 잠시 후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 멕시코인들의 가톨릭 신앙심이 남다르다는 걸 염두에 두시길.
이런, 지금 우리 테이블의 사람 숫자가 13! 13은 불길한 숫자다. 우리들 중 누군가는 오늘 밤 죽게 될 것이야.
자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이른바 멕시코 룰렛을 통해 누가 죽게 될지를 결정하기로 한다. 말 그대로 황당무계한 게임. 즉, 자정이 지나자마자 모든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앉아서 불을 끈 후 한 사람이 총을 허공에 던진다. 그 총을 잡게 되는 사람은 그들 중 가장 용감한 사람, 그가 총을 쏘면 역시 그들 중 가장 겁 많고 비겁한 사람이 총에 맞아 죽게 될 것이다. 이건 용기를 시험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객기라고 밖에 볼 수 없는데, 모두들 겁쟁이 소리를 듣기 싫어서 이 황당한 룰렛 게임에 오케이를 한다.
그리고 게임은 시작되고, 한 명이 총에 맞는데... 바로 산빠블로 농민군 중 한 명. 자기가 제일 뚱뚱하기 땜에 이런 게임을 하면 자기가 총 맞을 가능성이 제일 많다고 얘기했던 친구였는데, 그만 배에 총알을 맞고 만 것. 그런데 죽지를 않았잖아. 사람들, 난리가 났다. 총에 맞기는 했지만, 누군가가 죽은 게 아니기 땜에 다시 룰렛 게임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이고, 이 무지한 인간들.
[강력한 스포일러] 이 때 피를 흘리며 나서는 우리의 뚱보 농민군: "더 이상의 희생은 무의미하다. 나 혼자로 족하다. 우리끼리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이렇게 얘기한 후 누가 말리기도 전에 총을 들어 머리에 빵~ 죽음을 자청한다.
친구의 갑작스런 죽음에 오열하는 다른 산빠블로 농민군: "이게 우리가 원했던 결과인가? 결과는 거꾸로 나왔다. 우리들 중 겁쟁이가 죽은 게 아니라, 우리들 중 가장 용감한 자가 죽었다."
멕시코 혁명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영화 그 어디에도 설명이 없다. 핍박받는 소작농들의 모습도 보여지지 않는다. 혁명의 경과도 다뤄지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빤초 비야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도 없다. 혁명이 일어났고, 빤초 비야가 있으며 그는 농민들의 영웅이고, 많은 농민들이 그의 군대에 가담하기를 원하며, 산빠블로의 여섯 농민들 역시 그들 중 일부였다 - 우리가 영화를 통해 알 수 있는 전후 상황은 이것이 전부다. 푸엔떼스 감독은 이미 알려져 있는 이러한 사실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다만, 자신의 이 영화에서는, 왜 농민들이 혁명에 가담했는지, 그리고 혁명에 가담한 농민들의 심리적 동기는 무엇이었는지, 이 주제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제시한다. 그리고 감독의 이 해석은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혁명에 가담한 농민군들의 대화와 행동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파악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위에서 언급한 멕시코인 특유의 마초이즘이다. 물론.... 이건 이 블로그의 쥔장이 보기에 그렇다는 얘기이지요.
푸엔떼스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메시지는 영화 마지막에 집약되어 있다.
[쥔장, 스포일러 신경 끊었음] 이제 두 명밖에 남지 않은 산빠블로 출신의 농민군. 가장 어린, 빤초 비야가 그래서 송아지라는 별명까지 붙여준, 막내가 이상증세를 보인다. 그리고 이 병세는 전투지로 이동하는 기차 안에서 더욱 심해진다. 의사의 검진 결과, 우리가 마마보다 더 무서운이라고 할 때의 그 마마, 즉 천연두에 걸린 것. 이는 전염병이기 때문에 즉시 빤초 비야에게 보고되고, 빤초 비야는 즉시 병자를 격리시키라고 명령한다. 이 명령을 실시하러 온 장군은 한 술 더 떠서, 즉시 산 채로 병자와 그 소지품들을 불에 태워 없애라는 지시를 내린다. 산빠블로 출신 농민 띠부르씨오는 이 명령 앞에 기가 막혀 하지만, 군을 위해서... 눈물을 머금고 명령을 실시한다. 자신의 손으로 막내를 죽인 후 화장을 하면서, 띠부르씨오는 만감이 교차하지만 그 모든 걸 속으로 삵힌다.
그리고 나타나는 빤초 비야. 아, 빤초 비야께서 직접 여기에. 약간은 감동 먹은 띠부르씨오. 명령대로 불에 태워 천연두의 모든 흔적을 없앴음을 보고한다. 그러나, 빤초 비야는 그런 띠부르씨오에게 전투에 참가할 수 없고, 그 역시 이곳에 남아야 한다고 명령한다.

띠부르씨오 자신마저 천연두 감염자 취급을 하며 뒤로 물러서는 빤초 비야. 그리고 그런 빤초 비야의 모습에 띠부르씨오는 깨닫는다. 무엇 때문에, 누구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그리고 친구들을 잃는 이 모든 희생을 감수했는데... 빤초 비야가 현장을 떠난 후 띠부르씨오는 한 마디 말을 남기고, 짐을 꾸려 쓸쓸히 떠나간다.
그리고 영화 끝. 감독의 진정한 의도를 보려면, 그러나 이걸로는 좀 약하다. 코드 1 출시 디븨디에는 또 다른 엔딩이 담겨 있다. 상영금지조치를 받았던 문제의 그 엔딩. 영웅 빤초 비야에 대한 멕시코의 존경심을 생각하면 상영금지조치가 이해가 되기도 하는데, 그 내용은,
그렇게 빤초 비야 군을 떠난 띠부르씨오는 고향 산빠블로에 돌아와 다시 농민 생활을 한다. 시간이 흐르자, 빤초 삐야에게 받았던 마음의 상처도 아물어가면서, 띠부르씨오는 어린 아들에게 자신의 무용담을 들려주면서 오히려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그러던 어느 날, 빤초 비야와 그 군대가 근처를 지나다가 띠부르씨오와 마주치게 된다. 서로를 알아 본 두 사람. 하하하. 반갑다. 서로 껴안고, 잠시 난리 부르스. 띠부르씨오는 반가움에 빤초 비야를 집안으로 초대해 음식을 대접한다. 불안한 표정의 아내와 딸.
빤초 비야는 예전 산빠블로 사자들의 용맹성을 얘기하면서 지금 그런 부하들이 필요하다고 띠부르씨오에게 다시 자신의 군대에 합류할 것을 설득한다. 그러나 띠부르씨오는 그러고 싶어도 가족, 특히 딸과 아내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어렵다고 대답한다. 말 없는 빤초 비야. 띠부르씨오에게 잠시 나가 있으라고 한다. 탕! 탕! 집 안에서 들리는 총소리, 그리고 밖으로 걸어나오면서 빤초 비야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무정한 소리: "자, 이젠 아내도 딸도 없어졌으니, 부담 없이 나에게 합류해라."
이 무슨 황당한 시츄에이숑. 격분한 띠부르씨오, 옆 사람 총을 뺏어 빤초 비야를 겨눈다. 그러나 빤초 비야의 부하, 이를 보고 탕! 띠부르씨오 죽고만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다가 울부짖는 띠부르씨오의 어린 아들. 빤초 비야 아이를 달래는데, 이 때 아이가 하는 말: "흑흑흑... 아빠랑 빤초 비야한테 갈려고 그랬는데.... 그래서 같이 싸울려고 그랬는데..."
빤초 비야: 그랬니? 빤초 비야에게 갈려고 그랬어?
아이: 네.
빤초 비야: 빤초 비야 여기 있다.
빤초 비야 얘기를 듣자마자 울음을 멈추고 미소짓는 아이. 영화 끝.
이 엔딩에 감독의 의도가 모두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 193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멕시코 혁명은 그 열기가 아직까지 남아 있는 상태였고, 농민의 영웅, 민중의 영웅 빤초 비야는 전설이 되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푸엔떼스 감독에게 혁명은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고 서로가 서로를 죽인 내전(內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농민들에게는 이상실현의 기회처럼 느껴졌을지 몰라도, 혁명은 또 하나의 전쟁에 불과했고, 그 희생자는 다름 아닌 농민과 일반대중이었다. 어떤 대의, 어떤 생각을 갖고 혁명에 참여했든 이들은 혁명의 소모품에 불과했다. 혁명은 민중 영웅을 탄생시켰을지 모르겠으나, 그 이면에는 덧없이 죽어간 멕시코 민중의 시체들이, 대의를 위해 죽어갔다고 믿었던 민중들의 시체가 널부러져 있었다. 혁명은 신기루에 불과하다. 그러나 민중은 그 신기루에 끊임없이 현혹당하고 있다. 혁명이라는 미명 아래, 민중영웅와 함께 한다는 명분 아래. 아버지의 죽음을 방금 목격하고도, 빤초 비야에 웃음짓는 영화 속 어린 아이처럼. 혁명을 통해 권력을 쥔 자가 생겨나고, 바뀌고, 또 생겨나는 와중에, 혁명을 통해 멕시코가 궁극적으로 얻은 것은 무엇인가. 그 수많은 죽음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어떤 더 큰 의미가 혁명에 있었는가. 감독은 그렇게 묻고 있다.
<빤초 비야와 함께! (Vamonos con Pancho Villa)>(1936)는 멕시코 SOMOS 지에서 선정한 멕시코 역대 영화 100선 중 1위에 올라 있다.
푸엔떼스 감독이 처음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33년작 <13번 죄수 (El prisionero trece)>부터. 이 영화는 이후 <대부 멘도사 (El compadre Mendoza)>(1934)를 거쳐 <빤초 비야와 함께! (Vámonos con Pancho Villa)>(1936)로 이어지는 푸엔떼스 감독의 이른바 혁명3부작 중 첫 작품.
멕시코 영화계에서 가장 많이 다루어진 화두 중 하나가 바로 멕시코 혁명. 이는 멕시코 혁명이 그만큼 멕시코 민중에게 직간접적으로 끼친 영향이 크기 때문이리라. 푸엔떼스 감독의 혁명 3부작도 역시 이런 맥락에서 제작되었는데, 앞의 두 작품은 소문만 들었을 뿐 쥔장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뭐라 얘기할 수가 없고, 다행이 <빤초 비야와 함께!>는 미국에서 디븨디로 출시되어 이 포스트를 올릴 수 있게 되었다. 디븨디 만세.
영화는 제목에서 힌트를 주고 있듯, 멕시코 혁명과 빤초 비야, 그리고 혁명의 와중에 빤초 비야 군에 가담하는 농민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멕시코 혁명과 빤초 비야에 대해서는 여기를 클릭. 아니면, 바로 이전 포스트를 참조. 그 놈이 그 놈.

영화 원본의 보관상태가 열악, 리마스터링을 거쳐서 디븨디로 출시되었다는데도 화질이 썩 좋지가 않다. 따라서 일부는 영화 화면 캡춰, 일부는 디븨디에 들어있는 스틸 컷 중에서 사용.
혁명에 가담하기 위해 빤초 비야를 찾아온 여섯 명의 산빠블로 농민들




영화에서는 상당히 큰 스케일의 전투 씬이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상당히 역동적이다. 미국 출신의 잭 드레이퍼(Jack Draper)와 가브리엘 피구에로아가 맡은 촬영은 롱 샷을 통해 전투의 스케일감을, 그리고 적절한 미디엄 샷을 통해 전투의 생생한 모습을 전하고 있다.



푸엔떼스 감독은 전투 중간 중간 휴식을 취하는 동안, 전투에 가담한 농민들의 대화를 통해 이런 멕시코인들의 마초이즘을 드러내고 있다.




빤초 비야 군은 한 전투에서 수세에 몰리자, 적군에게 거짓 항복을 하는 척 하면서 시간을 벌어 전열을 가다듬으려 한다. 이를 위해 적군을 찾아가는 임무를 산빠블로의 농민군 세 명이 맡게 된다. 후에 빤초 비야 군의 항복이 거짓임이 들통나자, 사실이 확인될 때까지 인질로 잡혀 있던 이들 세 명은 빤초 비야 군 앞에서 본보기로 공개 교수형을 당하기 위해 적군들에게 끌려나가는데, 멕시코 마초들의 이 당당한 모습을 한 번 보시라.

이런, 지금 우리 테이블의 사람 숫자가 13! 13은 불길한 숫자다. 우리들 중 누군가는 오늘 밤 죽게 될 것이야.
자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이른바 멕시코 룰렛을 통해 누가 죽게 될지를 결정하기로 한다. 말 그대로 황당무계한 게임. 즉, 자정이 지나자마자 모든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앉아서 불을 끈 후 한 사람이 총을 허공에 던진다. 그 총을 잡게 되는 사람은 그들 중 가장 용감한 사람, 그가 총을 쏘면 역시 그들 중 가장 겁 많고 비겁한 사람이 총에 맞아 죽게 될 것이다. 이건 용기를 시험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객기라고 밖에 볼 수 없는데, 모두들 겁쟁이 소리를 듣기 싫어서 이 황당한 룰렛 게임에 오케이를 한다.

[강력한 스포일러] 이 때 피를 흘리며 나서는 우리의 뚱보 농민군: "더 이상의 희생은 무의미하다. 나 혼자로 족하다. 우리끼리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이렇게 얘기한 후 누가 말리기도 전에 총을 들어 머리에 빵~ 죽음을 자청한다.
친구의 갑작스런 죽음에 오열하는 다른 산빠블로 농민군: "이게 우리가 원했던 결과인가? 결과는 거꾸로 나왔다. 우리들 중 겁쟁이가 죽은 게 아니라, 우리들 중 가장 용감한 자가 죽었다."
멕시코 혁명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영화 그 어디에도 설명이 없다. 핍박받는 소작농들의 모습도 보여지지 않는다. 혁명의 경과도 다뤄지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빤초 비야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도 없다. 혁명이 일어났고, 빤초 비야가 있으며 그는 농민들의 영웅이고, 많은 농민들이 그의 군대에 가담하기를 원하며, 산빠블로의 여섯 농민들 역시 그들 중 일부였다 - 우리가 영화를 통해 알 수 있는 전후 상황은 이것이 전부다. 푸엔떼스 감독은 이미 알려져 있는 이러한 사실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다만, 자신의 이 영화에서는, 왜 농민들이 혁명에 가담했는지, 그리고 혁명에 가담한 농민들의 심리적 동기는 무엇이었는지, 이 주제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제시한다. 그리고 감독의 이 해석은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혁명에 가담한 농민군들의 대화와 행동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파악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위에서 언급한 멕시코인 특유의 마초이즘이다. 물론.... 이건 이 블로그의 쥔장이 보기에 그렇다는 얘기이지요.
푸엔떼스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메시지는 영화 마지막에 집약되어 있다.
[쥔장, 스포일러 신경 끊었음] 이제 두 명밖에 남지 않은 산빠블로 출신의 농민군. 가장 어린, 빤초 비야가 그래서 송아지라는 별명까지 붙여준, 막내가 이상증세를 보인다. 그리고 이 병세는 전투지로 이동하는 기차 안에서 더욱 심해진다. 의사의 검진 결과, 우리가 마마보다 더 무서운이라고 할 때의 그 마마, 즉 천연두에 걸린 것. 이는 전염병이기 때문에 즉시 빤초 비야에게 보고되고, 빤초 비야는 즉시 병자를 격리시키라고 명령한다. 이 명령을 실시하러 온 장군은 한 술 더 떠서, 즉시 산 채로 병자와 그 소지품들을 불에 태워 없애라는 지시를 내린다. 산빠블로 출신 농민 띠부르씨오는 이 명령 앞에 기가 막혀 하지만, 군을 위해서... 눈물을 머금고 명령을 실시한다. 자신의 손으로 막내를 죽인 후 화장을 하면서, 띠부르씨오는 만감이 교차하지만 그 모든 걸 속으로 삵힌다.






그렇게 빤초 비야 군을 떠난 띠부르씨오는 고향 산빠블로에 돌아와 다시 농민 생활을 한다. 시간이 흐르자, 빤초 삐야에게 받았던 마음의 상처도 아물어가면서, 띠부르씨오는 어린 아들에게 자신의 무용담을 들려주면서 오히려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그러던 어느 날, 빤초 비야와 그 군대가 근처를 지나다가 띠부르씨오와 마주치게 된다. 서로를 알아 본 두 사람. 하하하. 반갑다. 서로 껴안고, 잠시 난리 부르스. 띠부르씨오는 반가움에 빤초 비야를 집안으로 초대해 음식을 대접한다. 불안한 표정의 아내와 딸.
빤초 비야는 예전 산빠블로 사자들의 용맹성을 얘기하면서 지금 그런 부하들이 필요하다고 띠부르씨오에게 다시 자신의 군대에 합류할 것을 설득한다. 그러나 띠부르씨오는 그러고 싶어도 가족, 특히 딸과 아내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어렵다고 대답한다. 말 없는 빤초 비야. 띠부르씨오에게 잠시 나가 있으라고 한다. 탕! 탕! 집 안에서 들리는 총소리, 그리고 밖으로 걸어나오면서 빤초 비야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무정한 소리: "자, 이젠 아내도 딸도 없어졌으니, 부담 없이 나에게 합류해라."
이 무슨 황당한 시츄에이숑. 격분한 띠부르씨오, 옆 사람 총을 뺏어 빤초 비야를 겨눈다. 그러나 빤초 비야의 부하, 이를 보고 탕! 띠부르씨오 죽고만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다가 울부짖는 띠부르씨오의 어린 아들. 빤초 비야 아이를 달래는데, 이 때 아이가 하는 말: "흑흑흑... 아빠랑 빤초 비야한테 갈려고 그랬는데.... 그래서 같이 싸울려고 그랬는데..."
빤초 비야: 그랬니? 빤초 비야에게 갈려고 그랬어?
아이: 네.
빤초 비야: 빤초 비야 여기 있다.
빤초 비야 얘기를 듣자마자 울음을 멈추고 미소짓는 아이. 영화 끝.
이 엔딩에 감독의 의도가 모두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 193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멕시코 혁명은 그 열기가 아직까지 남아 있는 상태였고, 농민의 영웅, 민중의 영웅 빤초 비야는 전설이 되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푸엔떼스 감독에게 혁명은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고 서로가 서로를 죽인 내전(內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농민들에게는 이상실현의 기회처럼 느껴졌을지 몰라도, 혁명은 또 하나의 전쟁에 불과했고, 그 희생자는 다름 아닌 농민과 일반대중이었다. 어떤 대의, 어떤 생각을 갖고 혁명에 참여했든 이들은 혁명의 소모품에 불과했다. 혁명은 민중 영웅을 탄생시켰을지 모르겠으나, 그 이면에는 덧없이 죽어간 멕시코 민중의 시체들이, 대의를 위해 죽어갔다고 믿었던 민중들의 시체가 널부러져 있었다. 혁명은 신기루에 불과하다. 그러나 민중은 그 신기루에 끊임없이 현혹당하고 있다. 혁명이라는 미명 아래, 민중영웅와 함께 한다는 명분 아래. 아버지의 죽음을 방금 목격하고도, 빤초 비야에 웃음짓는 영화 속 어린 아이처럼. 혁명을 통해 권력을 쥔 자가 생겨나고, 바뀌고, 또 생겨나는 와중에, 혁명을 통해 멕시코가 궁극적으로 얻은 것은 무엇인가. 그 수많은 죽음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어떤 더 큰 의미가 혁명에 있었는가. 감독은 그렇게 묻고 있다.
<빤초 비야와 함께! (Vamonos con Pancho Villa)>(1936)는 멕시코 SOMOS 지에서 선정한 멕시코 역대 영화 100선 중 1위에 올라 있다.
# by | 2006/01/10 12:58 | 영화를 봤는데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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