빤초 비야 (Pancho Villa) - 멕시코의 로빈 훗

역사 공부 잠깐 하고 넘어갑니다. 멕시코가 스페인에게 점령당한 것은 1521년, 그리고 이후 300년간 식민통치를 당했다. 이 기간 동안 스페인은 멕시코의 모든 자원을 착취하면서 배를 불려나갔고, 멕시코는 상대적으로 쫄쫄 굶으며 지냈다. 동시에, 멕시코를 완전 스페인化 하기 위한 오만가지의, 좋게 말하면 정책, 나쁘게 말하면 만행이 저질러졌다. 그 결과, 멕시코 오리지날 인디오들은 점차 사라져 갔고 그 자리를 스페인-멕시코 혼혈이 메웠으며, 언어는 스페인어로 굳어졌고, 카돌릭이 국가 신앙으로 자리를 잡았다.

참을만큼 참았다, 더 이상은 노예처럼 못살겠다, 스페인을 몰아내자... 마침내 1810년 멕시코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821년, 멕시코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그러나 독립의 후유증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갈망하던 독립을 쟁취했건만, 멕시코는 이후 엄청난 혼란을 겪는다. 스페인이 빠져나간 공백이 너무 컸던 것. 못살겠다 갈아보자, 너도 별 수 없네, 그럼 또 바꾸자... 정권이 수십 차례 바뀌었고,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농민들의 봉기도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1876년, 뽀르피리오 디아스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정국은 안정을 찾기 시작한다. 그러나 여우 피하려다 사자를 만난 꼴이라고 할까, 디아스 대통령은 이후 35년간에 걸친 장기 독재 체제를 굳힌다. 물론, 디아스 대통령이 멕시코 재건에 나름대로 큰 역할은 했지만, 장기집권에 따른 부작용은 멕시코를 곪게 만들었다. 부정부패가 온나라를 휩쓸었고, 농민들의 삶은 더욱 황폐해져 갔다. 상처가 곪으면 언제가는 터지는 법, 독립 100주년이 되던 1910년, 마침내 멕시코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멕시코 혁명은 두 명의 걸출한 민중 영웅을 탄생시킨다. 남부의 에밀리아노 사빠따(Emiliano Zapata)와 북부의 빤초 비야(Pancho Villa)가 바로 그들이다. 스페인 식민치하 라틴 아메리카에서 농민들에게 족쇄와도 같았던 제도가 있었는데, 이를 "아시엔다(hacienda)"라고 한다. 일종의 소작농 제도인데, 전형적인 부익부 빈익빈 굳히기 모델이었다. 즉, 지주는 배가 터지도록 부유해지고, 반대로 농민은 굶어죽을 정도로 가난해지도록 만드는 제도였다. 독립 후에도 이 제도는 존속되어 농민들의 삶은 더욱 더 황폐해져만 갔는데, 에밀리아노 사빠따와 빤초 삐야는 이 제도를 폐지하여 대지주의 토지를 몰수, 농민에게 나눠줘야 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멕시코 혁명에 가담한다. 농민들에게는 당연히, 웰컴 사빠따, 웰컴 비야. 이 두 사람은 가는 곳마다 큰 인기를 끌면서, 수많은 농민들이 이들 혁명군에 가담한다.

오늘은, 이 두 사람 중 빤초 비야가 이야기의 주제. 왜 빤초 비야? 언제나 그렇듯 이유는 간단. 에밀리아노 사빠따와 빤초 비야는 멕시코에서 지금까지도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으며, 그 숱한 무용담과 일화로 인해 수많은 영화들이 제작되기도 했지만, 쥔장이 추후 계속해서 올릴 예정인 멕시코 영화 관련 포스트에 빤초 비야가 더 많이 등장하기 때문. 그리고 사실, 빤초 비야가 영화와 조금 더 관련이 많기도 하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생각해 보니 영어식 발음으로 더 잘 알려져 있을 수도 있으므로, 사빠따 = 자파타, 빤초 삐야 = 판초 빌라.

(왼쪽 사진: 이른바 멕시코식 카우보이라고 할 수 있는 차로 복장에 흰 말을 타고 있는 빤초 비야)
농민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떨쳐 일어난 혁명 영웅에서 잔인한 살인마에 이르기까지, 멕시코에서 빤초 비야만큼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도 드물다.

빤초 비야는 1877년 (일부 자료에 의하면 1879년) 멕시코 북부 두란고 지역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도로떼오 아란고. 모두가 찢어지게 가난했기 때문에 결혼은 꿈도 못 꾸고 그냥 살아가는 집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정식으로’ 결혼한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빤초 비야는 행운이었다. 아시엔다에서 생계를 꾸려나가는 모든 소작농 가족들이 그렇듯, 빤초 비야 역시 가난한 가정형편 때문에 정규교육은 받을 생각도 못한 채, 곡괭이를 들 나이가 되면서부터 밭에 나가 혹독한 일을 한다. 아시엔다에서 보낸 이 때의 경험은 빤초 비야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 즉, 대주주의 배만 불리는 아시엔다 제도의 모순과 소작농들의 피폐한 삶 등을 직접 목격하고 몸으로 부딪치면서, 후에 멕시코 혁명이 일어났을 때 농민들을 위해 떨쳐 일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빤초 비야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온 것은 16살 되던 1894년. 밭에서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빤초 비야는 자신의 12살 된 누이동생 마르띠나가 강간 당한 사실을 알게 된다. 강간범은 대지주 일가인 돈 로페스 네그레떼. 격분한 빤초 비야는 네그레떼를 살해한 후 집을 떠나 도피길에 오른다.


빤초 비야는 산으로 들어가서 한 산적 집단에 가담하는데, 이 산적떼의 두목 이름이 빤초 비야. 특유의 적응력과 리더쉽으로 산적떼에서 그 위치를 확고히 한 빤초 비야는 두목이 죽자 그 뒤를 이어받는다. 그리고 이름도 도로떼오 아란고에서 빤초 비야로 개명한다. 살인범으로 현상수배되어 있는 몸이어서 변신할 필요성도 있었고, 자신이 빤초 비야 조직의 적통 후계자임을 대외적으로 알릴 필요성도 있었기 때문.

빤초 비야가 산적 노릇을 했던 1900-1909년까지의 기간은 대체적으로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빤초 비야는 가진 자들을 약탈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의적, 즉 멕시코의 로빈 훗으로 명성을 얻게 되면서, 점차 민중의 영웅으로 떠오른다. 산적 시절, 빤초 비야에게는 삶이 곧 투쟁이었다. 먹고 살아야만 한다면, 무엇을 훔치든 누구를 죽이든 개의치 않았다. 디아스 대통령의 정책들은 대지주를 비롯한 기득권 계층 감싸 안기에 급급했고, 그런 정권이 만든 모든 법이 빤초 비야에게는 무의미했다. 한 마디로 타고난 반체제였으며, 그의 이런 체제에 대한 반골기질은 어린 시절 아시엔다에서 보낸 경험에서 비롯된다. 대지주들이 소작농들을 착취하여 모든 부를 독점하는 모습이 머리 속 깊게 각인되어 있는 빤초 비야에게, 그런 대지주를 옹호라는 체제는 갈아 엎어야만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반면에, 물론 100% 그렇지는 않았지만, 빤초 비야는 자기를 따르는 부하들이나 농민들에게는 가능하면 잘 해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1910년, 부정선거로 디아스 대통령에게 패한 후 미국으로 몸을 피해 있던 야당 대통령 후보 프란시스코 마데로가 디아스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전 멕시코는 봉기할 것을 주창하면서 멕시코 혁명의 불길이 타오르자 빤초 비야와 그의 산적떼는 산에서 내려와 프란시스코 마데로 혁명군에 가담한다. 산적에서 혁명군으로 탈태환골하는 순간이었다.

멕시코 북부의 빤초 비야, 남부의 사빠따 등을 비롯 멕시코 전역에서 反디아스 봉기가 일어났다. 특히 빤초 비야의 경우, 그 특유의 카리스마로 수많은 사람들을 사로 잡았고, 수많은 농민들이 앞 다퉈 그의 혁명군에 가담했다. 심지어 그의 혁명군에 가담해서 같이 싸우기를 원하는 미국인들도 있었는데, 빤초 비야 휘하에는 미국인들로만 이루어진 부대도 있을 정도였다. 빤초 비야는 자기 기분에 솔직한, 지극히 감성적인 리더였는데, 감성과 카리스마가 절묘하게 결합된 이 사나이에게 대중은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다. 나아가서, 빤초 비야는, 로빈 훗이 그랬던 것처럼, 대지주로부터 땅을 빼앗아 자기 군대의 숨진 병사들 가족에게 나눠줌으로써, 모든 부대원들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지도자로 믿고 따랐다. 그런데 영웅호색? 빤초 비야는 여자를 무척이나 밝혔다고 한다. 축제기간 동안에는 휘하 군대의 여군들과 밤새도록 춤을 추며 즐겼으며, 공식적으로 알려진 결혼 횟수만도 26회나 된다고.

각설하고, 마데로 혁명군은 승승장구, 반대로 디아스 정권은 오랜 독재의 취약성을 드러내며 허물어지기 시작, 마침내 1911년 5월 25일 디아스의 대통령직 사임과 함께 붕괴되고 만다. 마데로의 대통령 취임과 함께 멕시코 혁명은 일단 성공을 거둔 듯 했다. 그러나, 여기서 생겨나는 마데로의 착각. 마데로는 멕시코에 가장 시급한 것이 민주주의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를 밀어붙였으나, 그의 이상은 멕시코의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다.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나. 마데로는 아시엔다 제도에 대해서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고, 그 결과, 농민들은 여전히 굶주림에 떨어야만 했다. 농민들에게는 혁명이 성공했어도 그 의미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급기야 사빠따 같은 농민군 지도자들은 마데로를 배신자라고 비난하기 시작했고, 각처의 농민군들은 무장을 풀지 않고 저항에 들어갔다.

다른 한편, 마데로의 지지자들은 지지자들대로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했는데, 주로 마데로의 개혁정책이 너무 더디다는 것이 그 주된 이유였다. 결국, 마데로는 사면초가가 되었고, 정국은 불안해지기 시작했으며, 바로 이웃나라였던 미국이 보기에 불안정한 멕시코의 정국은 자기네들에게 결코 이로울 것이 없었으니... 나설 수밖에. 각본은 미국 정부가 짜고, 멕시코 현지 연출은 헨리 레인 윌슨 미국 대사가 맡았다. 윌슨 대사는 마데로 정권에 불만을 품고 있던 군부세력 중 빅또리아노 우에르따 (Victoriano Huerta) 장군을 꼬드겨서, 이른바 "비극의 10일'이라는 쿠데타를 일으켜 마데로 대통령을 살해하고 정권을 붕괴시킨다. 우에르따 장군은 마데로가 가장 신임했던 군장성이었는데, 이 무슨 허망한 죽음.

마데로가 살해당하고 우에르따 정권이 들어서자 이에 반대하는 혁명군 세력들이 다시 들고 일어났다. 그 중에서 꼬아우일라 주지사였던 까란사는 자신을 입헌군 최고사령관으로 칭하면서 모든 反우에르따 세력을 결집했는데, 이 입헌군의 주축세역이 바로 빤초 비야 군이었다. 입헌군 소속으로 북부 멕시코 지역을 장악한 빤초 비야는 미국에서도 멕시코 민중 영웅으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다. 수많은 헐리웃 영화제작자들과 신문사 사진기자들이 이 영웅을 영화화하고 취재하기 위해 북부 멕시코로 몰려 들었다. 빤초 비야는 돈을 받고 자신의 전투장면을 영화화 하는 것에 동의, 영화가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지금은 필름 원본이 남아 있지 않지만, 1914년에 제작된 무성영화 <빤초 비야 장군의 삶(The Life of General Villa)>이 바로 그 것. 원하는 장면이 제대로 안나오면 다시 전투를 벌였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빤초 비야는 영화 제작에 협조적이었다고 한다. 이 영화 제작과정을 중심으로 2003년 HBO에서는 <빤초 비야, 영화에 출연해서 자신의 역을 직접 연기하다(And Starring Pancho Villa as Himself)>는 제목의 TV용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빤초 비야 군이 정부군에 맞서 북부에서 승승장구 하는 동안, 사빠따는 남부에서 그 기세를 떨쳤다. 특히 빤초 비야의 도라도스(Dorados), 즉 '황금의 남자들'이라는 친위대는 말 그대로 천하무적이었다. 1914년, 결국 우에르따 정권은 무너졌고, 혁명군은 멕시코 시티 입성을 준비했다. 이 때 일화 한 토막. 빤초 비야는 술을 거의 못했다고 한다. 1914년 12월, 남부의 사빠따와 북부의 빤초 비야 군이 멕시코 시티 입성을 위해 외곽에서 만난 자리에서 사빠따가 건배를 제안했는데, 이 자리에서 빤초 비야는 브랜디 한 잔을 겨우 마시고 헤롱헤롱 거렸다고.

혁명군의 멕시코 시티 입성과 함께 혁명은 성취된 셈이었다. 그러나, 혁명 지도자들간의 이상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농민을 대표했던 빤초 비야와 사빠따는 소작제도인 아시엔다 폐지를 통한 자유농 실현을 주장했던 반면, 입헌군 최고사령관 까란사는 중앙집권적, 국가주의적 근대화를 모토로 삼았다. 결국, 이들 사이는 필연적으로 멀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사이가 벌어졌으니 어떡 해. 또 한 판 붙어야지. 까란사와 비야-사빠따 연합간의 싸움은 까란사의 패배로 끝나, 까란사는 멕시코 시티에서 추방당한다. 그리고 이제 멕시코 시티는 이들 두 민중 지도자들에게 장악된다.

그러나, 이들에게 추방당한 까란사, 여기서 그냥 물러날 사람이 아니었다. 까란사는 혁명전쟁 중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오브레곤과 손을 잡고 입헌파 세력을 다시 결집한다. 그리고 미국이 이들을 후원한다. 미국 입장에서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두 명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빤초 비야와 사빠따였기 때문이다. 농민정부는 무슨 얼어죽을, 그런 멕시코 정부는 미국에 도움이 전혀 안되니까.

베라크루스에서 세력을 결집하고 있던 까란사-오브레곤 연합의 입헌파는 비야-사빠따 연합에게는 위협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었고, 비야-사빠따는 이들을 척결하기 위해 1914년 군대를 파견한다. 그러나, 이 무슨 신의 심술, 오히려 비야-사빠따 군이 패배를 하면서 역공의 기회까지 제공, 까란사-오브레곤이 멕시코 시티로 입성하고 이번에는 비야-사빠따가 축출당한다.

여세를 몰아 빤초 비야를 무력화 시키기 위해 까란사-오브레곤은 빤초 비야를 계속 추적, 마침내 1915년 4월 셀라야(Celaya)에서 빤초 비야의 농민군과 오브레곤의 입헌군 사이에 대결전이 벌어진다. 이 전투에서 빤초 비야는 그의 전술을 역으로 이용한 오브레곤 군에게 대참패를 당한다. 그리고 자신의 근거지인 북부로 낙향한다.

멕시코 북부는 여전히 빤초 비야의 장악 하에 있었다. 빤초 비야는 북부 지역의 수많은 가축들을 훔쳐서 판 돈으로 군대를 먹여 살렸고, 미국과의 국경지대를 통해 미국측 상인들과 밀거래를 통해 무기를 사들이기도 했다. 이 무기 밀매와 관련, 미국인 민간무기상이 돈을 미리 받고도 무기를 넘겨주지 않자 1916년 국경을 넘어 미국 뉴멕시코 컬럼비아시까지 쳐들어 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미국 본토를 침공한 인물로는 빤초 비야가 유일하다는 사실을 혹시 아시는지? 이 당시 빤초 비야 군은 미국인들을 닥치는대로 살해, 빤초 비야는 미국에서 멕시코 민중의 영웅에서 잔인한 살인마로 낙인찍힌다. 이와는 반대로, 양키들에게 통쾌한 복수극를 펼치는 영웅으로서 멕시코인들에게 그의 인기는 더욱 높아져 갔다.

미국은 이러한 빤초 비야를 징벌하기 위해 반격전을 펼치는데, 퍼싱 장군이 징벌원정군 사령관을 맡은 이 반격전은 1916년과 1919년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으나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 때 미국에서 유행했던 말: "빤초 비야는 그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모든 곳에 있다." 한 마디로, 신출귀몰했다는 얘기. 게리 구퍼 주연의 <황야의 탈출(They Came to Cordura)>(1959)이라는 영화가 있는데,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바로 이 때 미국의 빤초 비야 징벌군에서 벌어진 내용을 담고 있다.

한편, 까란사는 1917년 대선에서 승리, 정권을 잡는다. 그러나 농민들에게 분배된 토지를 몰수하여 다시 대지주들에게 돌려주지를 않나, 노동자 농민은 탄압하면서 기득권 계층의 이익만 옹호하려 들지를 않나, 정권을 잡은 후 그의 행보는 지극히 반혁명적인 모습 일색이었다. 본색이 드러났다고나 할까. 게다가, 1919년 4월에는 평소 눈엣가시 같았던 민중영웅 사빠따를 암살한다. 사빠따 암살은 까란사에게 그대로 독이 되어 되돌아왔다. 혁명세력들이 이에 크게 반발하면서 反까란사 정서가 극에 달했고, 마침내는 오브레곤을 중심을 정권 퇴진 운동이 벌어진다. 결국, 까란사는 1920년 권좌에서 쫒겨나 도망가다가 살해당하고 만다. 자업자득의 비참한 말로.

이즈음, 멕시코는 오랜 혁명 전쟁의 후유증으로 황폐될대로 황폐되어 있었다. 농민이 떠난 토지는 잡초만 무성했고, 가축들은 혁명자금에 사용되느라 씨가 말랐고, 아버지, 형제, 아들을 전쟁에서 잃은 가족들의 애통한 울음소리가 전국을 메아리쳤다. 이런 상황에서, 빤초 비야에게도 더 이상의 전쟁은 무의미 해 보였고, 결국 두란고 북부 까누띠요 토지 25,000 에이커를 받는 조건으로 자신의 군대를 해산하고 일반인으로 돌아가기로 정부측과 타협을 한다. 부대원들에게는 각자 일정 지분의 토지와 일년 분의 봉급이 지불되었다.

25,000 에이커의 토지 소유주. 아시엔다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빤초 비야가 이제 대규모 아시엔다에 맘먹는 토지의 소유주가 되었다. 그러나 빤초 비야는 잔인한 아시엔다 제도의 폐혜를 잊지 않았고, 대지주가 된 지금, 그 폐혜를 되풀이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농민들의 대변자였던 빤초 비야는 대지주가 된 후에도 항상 그들을 잊지 않았다. 자신의 토지에 미국식 개량농법을 들여와 곡물 수확량을 늘였을뿐만 아니라 그 혜택이 궁극적으로 소작농들에게 더 많이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했다. 또한 은행을 직접 설립해서 소작농들에게 전례없이 싼 이자로 대출을 일으켜, 소작농들이 예전의 아시엔다 시절과는 달리 과도의 채무에 시달리지 않으면서 농사일에 임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또한 자신의 토지에서 일하는 소작농의 모든 어린이들에게는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자신은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으나, 배워야만 이 아이들의 미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빤초 비야는 자신의 농장에서, 자신이 꿈 꾸어왔던 이상적인 멕시코를 작게나마 건설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빤초 비야의 이 꿈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1923년 7월 20일 오전, 한 친구 아이의 세례식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빤초 비야는 일곱 명의 무장 괴한들에 의해 다섯 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암살당한다. 멕시코가 아직 혁명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을 때, 멕시코 혁명의 민중 영웅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멕시코 혁명 기간 동안 수많은 지도자들이 나타났고, 국가 경영에 관한 한 저마다 나름대로의 대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안정적인 정권 기반을 마련하지 못했고, 그 결과, 멕시코는 수많은 지도자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리고 수많은 대안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대혼란기를 겪었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도, 빤초 비야만큼은 그 추구하는 이상에 변함이 없었다. 농민들의 권익 보호가 그에게는 항상 제일 중요한 과제였으며, 어떤 정치노선과 동맹을 맺든, 빤초 비야는 초지일관 이를 주창했다. 자신이 부를 챙기기보다는, 아이들이 다닐 학교를 설립하고, 대지주에게 땅을 뺏어 농민들에게 나눠주고 싶어했다. 궁극적으로, 농민들이 아시엔다의 횡포에서 벗어나, 자유농이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일반인으로 돌아왔을 때도 그 이상을 잊지 않고, 자신의 농장에서 자신이 꿈 꾸어왓던 이상적인 멕시코를 작게나마 실현하고자 했던,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농민의 권익을 위해 싸웠으며, 마지막까지 농민을 위해 노력해 온 농민의 영웅, 그가 바로 빤초 비야였다.

by 8½이다 | 2006/01/09 11:35 | 영화를 봤는데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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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oculus at 2006/01/10 01:30
우와. 너무 잘 읽었어요. 쉽게 이야기 해주셔서 저같이 이해력 늦은 사람한테도 쏙쏙 들어오는걸요. 앞으로 영화보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네요. 2탄,3탄을 기대해도 되겠죠?(웃음) / 일단 권력을 잡게 되면 초심을 잃게 되는 혁명가들이 많은데 빤초 비야는 끝까지 자신의 이상을 잃지 않았다니, 충분히 농민의 영웅이라 불릴 만한 것 같네요. 좀 더 살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상을 현실에서 실현하는 것을 보여줬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듭니다.
Commented by 8½이다 at 2006/01/10 13:13
덕분에 나도 머리 속에 있던 것들을 글로 정리해서 좋기는 한데, 막상 글로 쓰려니까 자료를 또 뒤적거려야 하는 번거로움이. 책꽂이에 먼지 쌓인 라틴 영화 관련 미국에서 출시된 책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다시 보니, 첨부터 끝까지 본 게 거의 없더라는... 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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