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멕시코 영화계는 1930년대 중반부터 195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황금기를 맞는다. 이 황금기를 연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가 바로 아르까디 보이틀러 감독의 1934년작 <항구의 여인 (La mujer del puerto)>.
이 영화는 개봉과 함께 대성공을 거두면서 숱한 화제를 낳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 왼쪽 사진의 안드레아 빨마. 멕시코 영화계에서 첫 '디바'로 여겨지는 안드레아는 바로 이 영화를 통해 은막에 데뷔했는데, 말 그대로 하룻밤 사이에 대스타가 된 경우였다. (사진은 영화 <항구의 여인>의 스틸 컷.)
1931년에 비슷한 소재를 다룬 영화 <산따 (Santa)>의 성공에 힘 입어 만들어진 <항구의 여인>은 <산따>의 성공을 훌적 뛰어넘으면서, 주연을 맡은 안드레아 빨마와 도밍고 솔레르(역시 이 영화가 데뷔작이었다)를 일약 대스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동시에, 이 영화는 추후 멕시코 멜로드라마 형식의 영화에 하나의 이정표를 제시한 작품으로도 평가되는데, 영화에서 안드레아 빨마가 맡은 비운의 여인 로사리오는 멕시코 영화계에서 창녀의 프로토타입으로 받아들여진다. 흔히 천박하다고 여겨지는 몸 파는 여인의 이미지에서 탈피, 안드레아는 독일의 전설적인 스타 마릴레네 디트리히의 이미지를 절묘하게 끌어들여 지적이면서 동시에 퇴폐적인, 함부로 다가서기 어려운 듯 하면서도 동시에 남자들이 자신도 모르게 끌리게 되는 그런 분위기의 창녀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안드레아는 한때 미국 헐리웃에서 스탭으로 일한 적이 있었다. 안드레아는 디트리히가 헐리웃으로 건너왔을 때 그녀의 메이크-업 컨설턴트 일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뇌리에 깊이 남았던 디트리히의 분위기를 영화 <항구의 여인>에서 로사리오에 접목시켰고,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겉으로 봐서는 전혀 몸 파는 여인의 이미지가 풍기지 않지만, 지적이면서 끈적끈적한 매력으로 남자를 유혹하는, 안드레아의 이 독특한 창녀의 이미지는 수많은 영화팬들을 열광시키면서 그대로 영화 및 개인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경고: 스포일러 100%. 내용이 상당히 길고, 영화 캡춰 장면 많음. 글쓴이가 경고했으므로, 이후 읽으시는 분들의 책임입니다.
모파상의 단편소설 "항구"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아르까디 보이틀러 감독의 <항구의 여인>은 한 여인의 기구한 삶을 다루고 있다. 이 소재를 더욱 극명하게 부각시키기 위해, 그리고 (당시의 영화 기술적인 문제로 인해) 자칫 밋밋해지기 쉬운 영상과 이로 인한 드라마틱 파워의 반감을 최소화하기 위해, 감독은 다양한 촬영 및 편집기법을 활용하고 있는데,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클리쉐로 치부될 수 있을지 몰라도, 1930년대 상황에서는 상당히 참신한 시도였다고 보여진다.
항구의 다양한 모습과 함께 오프닝 크레딧이 끝나면, 영화는 드넓은 꽃밭에서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두 연인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그리고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데, 여자가 나 잡아봐라~ 그러면서 도망가고, 남자는 그 뒤를 쫒아간다. 그러다가 여자 넘어진다. 아이구, 자기야 아팠어? 남자가 쓰러진 여자에게 다가서면서 다정하게 속삭인다. 여자, 몰라, 몰라.... 그리고 둘이 껴안는다.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작업(?)이 진행된다. 작업 끝났다. 나른한 두 사람의 모습. 여주인공 로사리오, 애인과 함께 무척 행복해 보인다.
작업 끝났으면 내려와야지요? 이 영화에서 두번째로 가장 아름다운 장면. 감독은 영화 곳곳에서 은유적 기법을 이용하고 있는데, 이러한 장면 처리와 그림자가 등장하면 그 다음 전개될 시퀀스는 좀 불길하지 않겠니? 그런 복선이 깔려 있다.
장면 바뀌면, 달력을 보여주면서, 알겠지? 지금은 카니발 축제기간이다 하고 노골적으로 알려준다. 그리고 축제에 참가해서 즐겁게 노는 사람들 모습. 아니, 그런데? 여자를 꼬시기 위해 작업중인 이 남자는? 로사리오의 애인이 아니던가.
철썩같이 믿고 있는 애인이 다른 여자에게 작업 중인 사실도 모른 채, 로사리오는 병세가 깊어만 가는 아버지 때문에 수심이 가득하다. 이 장면에서, 감독은 병마에 시달리는 아버지의 모습과 슬픔에 잠긴 로사리오의 모습을 오버랩 시킴으로써, 두 모녀의 안타까운 현실에 대한 관객의 보다 적극적인 정서적 동화를 유도한다.
아름다운 로사리노의 모습과 달리, 집안은 하루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하다. 그러니 아버지에게 약을 사드리려 해도 돈이 없다. 주변에서 백방으로 돈을 구해보지만 돌아오느니 찬바람 뿐. 할 수 없이, 같은 공동주택의 이층에 사는 애인에게 도움을 청하러 올라갔는데 문이 열리는 순간, 망할 짜식이 다른 여자와 바람를 피우고 있잖아! 현장에서 딱 걸린 것이야. (로사리오 뒷편의 그림자 보이나요?)
당황한 애인: 아, 로사리오, 이 이게 말이야, 어떻게 된 일인가 하면... / 로사리오: 에잇, 더러운 놈! 너 같은 거 이제 필요없어, 믿었던 내가 바보지. 흑흑흑.... / 로사리오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집을 뛰쳐 나가는데, 이층에서 이렇게 소동이 벌어지는 소리를 아랫층에 있던 아버지가 다 들어버렸어요. 가뜩이나 로사리오의 애인을 탐탁치 않게 여기던 아버지였는데, 그 놈이 감히 자기 딸을 우롱하다니, 참을 수가 없지요. 그래서 망치를 들고 때려 죽이려고, 아픈 몸을 이끌고 이층으로 올라갔다가 그만 몸싸움 끝에 계단 아래로 굴러 버리는데... (아래, 윗쪽 두 그림에서의 그림자)
로사리오가 약방 주인에게 간청 끝에 외상으로 약을 구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이미 차가운 시신으로. 애인은 배신을 때렸고, 이제 이 세상에서 로사리오가 유일하게 유지하면서 살아올 수 있었던 아버지마저 곁을 떠나간 것이다.
장면 바뀌면, 화려한 축제의 모습. 그리고 즐거워 하는 사람들. 비슷한 장면들을 한동안 보여주다가, 쓸쓸한 로사리오 아버지의 장례 운구 모습으로 장면 전환. 세상에서 소외되어 홀로 남겨진 상황의 극적 대비.
한 술 더 떠서, 사람들은 장례가 축제 분위기를 망친다면서 운구 행렬을 방해한다. 집단 이기주의, 그리고 그 집단에 속하지 않는 자에 대한 철저한 배척. "나"와 관계없는 모든 것은 중요치 않다. 로사리오의 오열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행패는 더욱 기승을 부리다가, 누군가가 이 장례가 같은 마을사람인 안토니오(로사리오의 아버지)임을 알아차린 후 그 사실을 알리자 사람들 모두 그때서야 숙연한 분위기로 운구행렬을 뒤따른다. "나"와 관계있는 일로 밝혀진 후 사람들이 보여주는 이중적인 태도, 이 사회의 단면. 그리고 이어지는, 처연한 슬픔에도 아름다움이 있다면 바로 이 장면일 듯. 묘지로 들어가기 전의 이 쓸쓸한 샷은 (그리고 장례식 전체 시퀀스는) 앞으로 로사리오가 세상에 홀로 던져져 겪게 될 험난한 삶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암시한다.
영화를 크게 두 흐름으로 나누면 여기까지가 전반부, 이후 내용이 후반부가 된다. 후반부는 항구로 들어오는 배 한 척의 모습을 다각도로 보여주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항구의 모습. 오랜 항해에 지친 선원들이 정박 후 자연스럽게 찾아가는 곳은 캬바레. 여기서, 영등포의 황태자 캬바레? 그런 식으로 우리나라 캬바레를 떠올리면 안되겠습니다. 춤도 추고, 술도 마시고, 여자도 만나고, 이층으로 올라가서 응응응도 하고, 뭐 그런 멕시코식 복합주점이라고나 할까. 각설하고, 영화는 이 캬바레의 흥청망청, 떠들썩한 분위기를 마음껏 보여줍니다.
어느 한 순간, 샷이 바뀌면, 캬바레 안의 떠득썩한 모습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카메라는 캬바레 밖 등불 하나 외롭게 서 있는 골목을 담는다. 그리고 화면 하단에서 점차 그 모습을 보이는 여인. 아, 로사리오! 등 패인 야한 옷을 입고 입에 담배를 문 채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모습에서, 순박했던 옛날의 로사리오는 이제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카메라는 계속해서 로사리오의 상반신을 클로즈-업으로 잡으면서, 동시에 오버랩을 통해 그녀를 스쳐간 수많은 남자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때 흐르는 무척이나 애절한 곡조의 노래, 아침이면 떠나가는 사랑. 항구의 여인의 삶을 담은 이 노래를 통해, 그리고 오버랩 되는 수많은 상황들을 통해, 영화는 그동안 로사리오가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그 편린들을 보여준다.
이윽고 캬바레 안으로 들어오는 로사리오. 그 우아한(?) 자태로 뭇남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동시에 뭇여자들의 시기어린 시선도 한 몸에 받으면서, 카운터에 자리를 잡자 옆에 남자가 술을 사겠단다. 그런데 이 남자 이미 취할대로 취했네. 이런 사람들의 한 가지 공통점이 있지요. 추근덕거리는 거. 아니나 달라, 술 취한 이 남자, 다짜고자 로사리오를 껴안고 입을 맞추려고 한다. 반항하는 로사리오, 그러나 남자의 완력 앞에서는 속수무책. 이 때, 나타난 흑기사, 그 이름 알베르토. 다른 선원 친구들과 함께 캬바레에 있던 알베르토가 주정뱅이 남자를 한 방에 보내버린다.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 준 알베르토에게 그윽한 시선을 보내면서 이층으로 올라가는 로사리오. 자기를 따라서 올라오라 이거지. 꼬시는 거야. 그런데 이층의 용도는? 아래층에서 눈이 맞은 남녀가 응응응 하러 올라가는 곳인데...... (그런데, 그림자가?)
먼저 이층에 도착한 로사리오. 뒤따라 올라온 알베르토. 그리고 그림자 길게 처리한 감독의 어떤 의도.
방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사랑을 나누는 두 사람. 첫 눈에 서로 맘에 들었다, 이거지.
그 다음 장면이 힛트. 서로 껴안고 키스하는 로사리오와 알베르토의 모습을 보여주다가, 갑자기 장면이 바뀌면서 캬바레 안의 질퍽한 모습이 나타난다. 여자의 웃옷을 확 찢어버리는 남자, 그리고 드러나는 여자의 가슴. 오 마이 갓, 30년대 영화에 이 무슨 착한 장면이. 방 안에서도 그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거지....
장면 바뀌어, 여명이 밝아오는 바닷가의 모습. 그리고 방 안으로 카메라 들어오면, 나무 소파 위에 벗어놓은 두 사람의 옷. 좋은 시간 지나 아침이 되었다 이거지요. 숏 타임, 롱 타임, 그런 얘기는 여기서 하면 안됩니다.
보통은 아침이 되면 그냥 굿 바이~ 하고 헤어지는 법인데, 밤 새 만리장성을 쌓으면서 정이 들었는지, 두 사람 이런 저런 신변잡기 얘기를 한다. 여기 출신이냐? 아니다. 그럼 어디? 로사리오가 꼬르도바에서 왔다고 대답하자, 알베르토가 "꼬르도바?" 하고 되물으면서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왜? 꼬르도바와 무슨 관계라도? 그러다가 로사리오가 당신은 고향이 어디냐고 묻자, 자기는 그냥 선원이라고만 대답하면서 뭔가 회피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로사리오는 알베르토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기 때문에 고향이 따로 없다고 하자, 선원들을 많이 알고 있느냐? 그렇다면 혹시 알베르토라는 선원을 아느냐고 묻는다. 알베르토! 로사리오의 입에서 알베르토라는 이름이.
무척이나 당황한 알베르토. 로사리오에게 어떻게 알베르토를 아느냐고 다구쳐 묻는다. 처음에는 알베르토를 아는 친구가 있다고 얼버무리다가, 로사리토의 입에서 튀어나온 충격적인 한 마디.
이 순간, 깨닫는 알베르토. 로사리오가 바로 자신의 여동생!
그리고 역시 눈 앞의 남자가 알베르토, 자신의 오빠임을 깨닫는 로사리오.
(변사 목소리) 이 무슨 인연의 장난이란 말인가. 어찌 오누이가 서로를 몰라보고, 하룻밤 롱 타임 사랑을 나누었더란 말이냐. / 이어지는 알베르토의 절규. 정리해 보면, 알베르토는 로사리오가 아직 꼬맹이였을 때 고향을 떠나 선원이 되었다. 그리고 그 후 고향과 소식을 끊고 지냈기 때문에, 성인이 된 로사리오의 모습을 전혀 알아볼 수 없었던 것이고, 그냥 몸 파는 항구의 여인으로만 알고 하룻밤 사랑을 나누었던 것인데...
자신의 친오빠와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난 후 충격에 휩싸인 로사리오는 울부짖다가 방을 나와 계단을 내려온다. 그리고 그림자. 카메라는 이를 로사리오 본인의 모습보다 그림자가 더욱 고개를 숙인 상태로 잡았다.
캬바레 밖을 나와 절망에 휩싸여 하염없이 항구를 거닐던 로사리오. 그녀의 발길이 닿은 곳은 방파제.
그리고 이어지는 또 하나의 명장면. 방파제 둑에 사납게 부서지는 파도를 맨 몸으로 받아내며 울부짖는 로사리오. 거친 파도와도 같았던 세상 앞에 홀로 버려진 로사리오에게 이 세상은 마지막까지 잔인했다. 애인의 배반, 아버지의 죽음, 항구의 여인으로서 살아왔던 고달픈 삶, 그런 그녀에게 친오빠와의 근친상간까지... 세상을 향한 로사리오의 처연한 울부짖음은 그러나 파도에 묻혀 메아리조차 없다. 그러나, 영화는 얘기한다. 이것이 곧 이 세계의 모습이라고.
로사리오를 찾아 항구를 헤매고 다니던 알베르토, 방파제까지 이르른다.
그러나, 로사리오는 그 어디에도 없고, 방파제에서 알베르토의 눈에 들어온 것은 로사리오의 스카프 뿐.
그리고, 영화는 로사리오의 스카프를 부여잡고 울부짖는 알베르토의 모습을 클로즈-업으로 잡으면서 끝을 맺는다.
1934년 개봉 당시 이 <항구의 여인>은 전 멕시코를 울음바다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멕시코 고전영화 10선 리스트"에 항상 오를 정도로, 이 영화는 멕시코 영화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시대를 뛰어넘어, 그 시대적 정서를 염두에 두고 이 영화를 감상하다 보면 그 이유가 납득이 된다.
1949년, <항구의 여인>은 똑 같은 설정을 바탕으로 마리아 안토니에따 폰스를 로사리오 역으로 캐스팅하여 역시 같은 제목으로 리메이크 되었다. 이 여배우의 미모가 나름대로 또 만만찮다. 1949년작 예고편 중에서 한 장면.
그리고 역시 멕시코의 아루트로 립스타인 감독에 의해서 1991년에 다시 한번 리메이크 되었다.
DVD: 예전에 Vanguard에서 내놓은 구판과 최근 Facets Video에서 출시한 신판, 두 종류가 있다. 구판은 영어자막 없고, 화질 대단히 열악하여 비추천. 신판은 영어자막 있고, 화질이 어느 정도 보정되어 - 이 영화가 1934년도 작품임을 감안하시라 - 출시되었으나 가격이 만만찮아서 권하기가 조금 애매모호. 참고로, 이 글에 사용된 그림들은 모두 Facets Video 출시본에서 캡춰한 것임.
IMDb 12/06/2005 현재 평점: 9.6 (그런데 참여 인원이 18명. 그 중에 나도 한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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